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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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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전북지역 희생자이지만 제대로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다가 사망한지 18년이 지나서야 공식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숨진 학생회관 앞 광장은 '이세종 광장'으로 명명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이후 전북지역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주열 학생 사건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의거에 참가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는 마산상고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다가 4월 11일 바다에 시체로 떠오른 채 발견되었습니다.이 사건은 4·19 혁명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광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하였다 .
80년 민주화 열망은 임균수 열사에게도 전달되었다. 5월 17일 원광대에도 휴교령이 내려져 예정된 봉사활동을 취소하고 광주로 내려갔다. 21일 광주 임 열사는 금남로 시위대열에 함께 하고 되고 도청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임 열사는 총탄에 맞아 22살 꽃다운 나이로 쓰러지게 된다. 80년 광주에서 흘려진 숭고한 피와 땀이 이 역사 속에서 다시 피어나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